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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가 수면시간과 경쟁한다면, 오프라인 매장은?

이 스토리는 <오프라인 비즈니스, 상상력이 미래를 바꾼다>7화입니다



*이 콘텐츠는 네오밸류의 제작비 후원을 받아 만들었습니다.

아이러니했습니다. 이로운 시도가 새로운 시련을 낳은 셈이니까요. 오프라인 공간이 미디어로 진화한 덕분에 오프라인 매장은 온라인 커머스뿐만 아니라 미디어나 콘텐츠와도 경쟁해야하는 처지에 놓였습니다. 온라인 커머스 업체들만큼이나 미디어나 콘텐츠 업체들도 만만치 않으니,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더 험난한 길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이 방향성이 논리적인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란스러웠지만 정신줄을 다시 붙잡고, 이 역설적인 상황을 해석하기 위해 질문을 던집니다.

오프라인 비즈니스는 진화 방향과 관계없이 미디어나 콘텐츠와 경쟁할 처지 아니었을까?

3화에서 밝혔듯 X세대인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그가 대학교 다닐 때 주목받았던 책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나이키의 상대는 닌텐도다》였는데, 경쟁 영역이 파괴되는 현상을 흥미롭게 설명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의 핵심 메시지는 '시장 점유율(Market share)'이 아니라 '시간 점유율(Time share)'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는 고객의 시간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동종 업계 간 경쟁에만 갇혀서는 위험하다는 설명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나이키와 닌텐도의 관계죠. 스포츠 용품을 파는 나이키와 게임기를 파는 닌텐도는 산업이 달라 경쟁할 일이 없어 보이지만, 산업이 아니라 고객의 시간을 중심으로 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집안에서 닌텐도 게임을 하는 시간이 늘어날 경우, 자연히 운동할 시간이 줄어드니 나이키에 위협이 된다는 거죠.

15년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이 책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어쩌면 더 필요해졌을 수도 있죠. 라이프스타일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산업 간 영역은 더 파괴되고 고객의 시간을 총체적으로 설계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전에 나온 개념이라 올드한 생각이 든다면, MZ세대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넷플릭스의 창업자이자 CEO인 리드 헤이스팅스의 말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넷플릭스는 수면 시간과 경쟁합니다.

고객이 넷플릭스를 시청하는 시간을 늘리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넷플릭스는 수면 시간을 경쟁의 대상으로 본다는 겁니다. 콘텐츠가 재미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보니까요. 수면 시간을 경쟁 상대로 지목하면서 시간 점유율을 뺏어 가는 모든 업체와 경쟁한다는 것을, 동시에 수면 시간 시간 말고는 딱히 경쟁 상대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을 사실상 선언한 셈입니다. 수면 시간을 꺼내든 리드 헤이스팅스의 언급은 시장 점유율이 아니라 '시간 점유율'의 관점으로 바라보기에 가능한, 창의적인 표현입니다.

오프라인 비즈니스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시간 점유율로 바라보면 오프라인 비즈니스는 이미 온라인 커머스뿐만 아니라 미디어나 콘텐츠 업체와도 경쟁하고 있었던 거죠.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미디어화되는 것과 관계없이 말이죠. 미디어나 콘텐츠 보는 시간이 늘어나면 밖으로 나올 일이 줄어드니까요. 이런 상황이라면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영역의 틀을 깨고 미디어로 진화하는 방향은, 경쟁을 심화시키는 험난한 길로 뛰어드는 게 아니라 생존과 성장을 위해 필요한 길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시간 점유율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프라인에도 '돌려볼 채널'이 필요하다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 스토리, 쇼필즈 등 6화에서 소개한 곳들을 다시 곱씹어 봤습니다. 오프라인 공간이 미디어화되는 현상을 이끄는 사례를 이리저리 뜯어보다 보면 진화의 방향에 대한 또 다른 단서를 찾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가 매장 내에서의 체험이 아니라 매장에 도착하기까지의 경험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뉴욕에 있는 스토리와 쇼필즈를 방문할 때는, 그 여정이 목적지향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변에 들를 만한 곳이 딱히 있지 않았으니까요. 스토리와 쇼필즈를 갈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었죠. 반면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을 갈 때는 반대였습니다. 백화점에 가기까지 중간중간에 이 가게 저 가게를 구경하고, 기웃거리느라 백화점에 도착하기까지 예상보다 시간이 더 걸렸죠. 만약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에 갈 목적이 없었더라도 샹젤리제 거리를 걷는 재미가 있어, 그 거리에 갈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분이 드는 건 퇴사준비생 이모씨의 개인적 취향 때문이 아닙니다. 이론적으로도 설명 가능한 현상이죠.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면 퇴사준비생 이모씨가 샹젤리제 거리에서 느낀 재미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거리에 매장이 있는 경우, 행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둘 중 하나입니다. 매장으로 들어가거나, 말거나. 여기서 매장이 하나 더 늘어나면 행인의 선택지는 4가지가 됩니다. 앞과 뒤의 매장 둘 다 들어가는 경우, 둘 다 지나치는 경우, 앞의 매장은 들어가지만 뒤의 매장은 지나지는 경우, 그 반대의 경우죠. 이대로 매장의 수가 n개로 늘어나면 선택의 조합이 2의 n제곱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합니다. 경험이 다채로워지고, 그만큼 재미를 느낄 확률이 높아지는 겁니다. 이 책의 저자 유현준 교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거리의 매장수와 고객 경험의 상관관계를 TV 채널에 비유해 이해하기 쉽게 부연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서 5미터에 하나씩 점포의 출입구가 나온다는 것은 보행자의 속도를 시속 4킬로미터로 보았을 때 4.5초당 새로운 점포의 쇼윈도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쇼윈도를 통해서 제공되는 시각적 정보는 신상품 옷일 수도 있고 식당에 앉은 사람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TV를 시청하면서 특별히 볼 채널이 없을 때 2~3초에 한 번씩 채널을 바꾼 경험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이런 경우 특별히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없더라도 서로 다른 채널의 화면 속 영상들이 새로운 시퀀스로 편집되어서 새로운 의미를 전달하기도 하고, 단순하게는 다른 채널로 바뀐다는 변화의 리듬감 때문에도 끊임없이 TV 앞에 앉아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4.5초당 점포가 변화된다는 것은 4.5초당 케이블 TV의 채널을 바꾸는 것과 같은 효과를 뜻한다."

-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 설명에서 알 수 있듯 만약 자동으로 TV 채널이 돌아간다면, 한참만에 채널이 넘어가기보다 빠른 주기로 이어질 때 TV 앞에 오랫동안 앉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꼭 자동으로 넘어가는 게 아니더라도 볼만한 콘텐츠가 여러 개 있을 때 TV를 오래 보게 되는 거죠.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여기에 오프라인 매장이 미디어로서 시간 점유율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프라인 매장은 미디어로 진화하기 위해 공간을 감각적으로 콘텐츠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당길 수 있는 자력이 생기죠. 하지만 그 힘은 나홀로 덩그러니 위치할 때보다 여럿이 함께 할 때 커집니다. 여러 매장이 연속해서 있을 때, 그래서 사람들의 능동적인 선택권이 늘어날 때, 사람들이 그 지역 또는 거리 등을 방문할 확률이 올라간다는 거죠. 당장은 매장끼리 고객 유입을 두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지역 또는 거리의 매력을 높여 트래픽을 키운 후 그것을 나누는 것이 모두에게 더 도움이 되는 접근입니다. 특히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온라인 커머스와도, 그리고 미디어나 콘텐츠와도 경쟁해야 하는 처지라면 오프라인 매장끼리 더욱 힘을 모을 필요가 있죠.

연장선상에서 오프라인 비즈니스에서 채널의 의미도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채널이 유통을 할 수 있는 통로나 경로로 쓰였다면, 이제는 채널을 다양한 콘텐츠가 담긴 TV 채널과 같은 개념으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Function'의 뜻을 문과생은 '기능'이라고 해석하지만, 이과생은 '함수'로 이해하는 것처럼요. 결국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시간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선 개별 매장이 콘텐츠를 가진 미디어가 되는 건 물론이고, 이런 매장들이 모여 하나의 채널을 이룰 수 있어야 하는 겁니다. 오프라인 공간은 채널화를 통해 떠나 보고 싶은, 혹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여행지가 되어야 하는 거죠.

#1. 위기의 시장을 구하는 지혜 - 올드 스피탈 필즈 마켓

오프라인 비즈니스에서 채널이 중요하다면 시장은 왜 고전하는 걸까?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시장에 주목했습니다. 시장은 태생적으로 여러 가게들이 모여 있어 방문하는 재미를 주는 곳이니까요. 하지만 시장은 오프라인 비즈니스 중에 가장 큰 위기를 겪고 있는 영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 가설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스터디하다보면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채널'에 대한 생각을 더 구체화시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런던을 다녀왔던 기억을 되살립니다. 런던에는 브릭레인 마켓(Brick lane market), 버로우 마켓(Borough market), 포토벨로 마켓(Portobello market), 캠든 마켓(Camden market),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Old spitalfields market) 등 여전히 생기 있는 시장이 많으니까요.

이중에서 그의 마음에 들었던 시장은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이었습니다. 런던에 있는 여느 시장과 달리, 전통적인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모던함을 더했기 때문이죠. 모던함을 더했다는 건 부활을 시켰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은 350여년 전에 조성된 시장인데,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활력을 잃어 갔습니다. 이 시장에 다시 생기를 불어 넣는 작업을 부동산 개발회사 '밸리모어 그룹(Ballymore group)'이 주도했습니다. 리빌딩의 핵심은 시장을 가변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만들어 다채롭게 하고, 즐길거리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방향성 아래 바뀐 시장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선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에 들어서면 나무로 된 가판대와 철제로 된 음식 판매대가 눈에 띕니다. 중정형으로 생긴 공간에 가판대와 음식 판매대가 구획에 맞춰 정렬되어 있는데, 이 둘의 디자인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정갈하고 감각적이라 쇼핑의 기분을 자극하고, 시장의 분위기를 통일성 있게 만듭니다.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밸리모어 그룹은 가판대와 음식 판매대를 중요한 요소로 봤습니다. 시장의 중심을 잡아줄 뿐만 아니라 모듈화를 통해 시장을 가변적으로 만들 수 있는 핵심으로 봤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판대와 음식 판매대 디자인을 영국의 대표적인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에게 맡겼습니다. 참고로 노먼 포스터는 '런던 밀레니엄 타워'와 애플 신사옥인 '애플파크'를 디자인한 건축가입니다. 덕분에 시장의 분위기가 한결같으면서도 다양해집니다.

가판대와 음식 판매대로 연출한 시장 분위기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건 지붕입니다.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은 건물로 둘러싸인 중정형 공간에 위치해 있지만, 그렇다고 천장이 뚫려 있는 건 아닙니다. 산 모양으로 뾰족하게 솟은 지붕 5개가 이어져, 중정형 공간을 덮고 있죠. 밸리모어 그룹은 그냥 나둬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지붕에도 손을 댑니다. 역사성을 고려해 지붕 모양은 유지하면서도 일정 부분의 면을 빛이 투과할 수 있게 리모델링했습니다. 덕분에 조명이 없어도 시장이 밝아지고, 공간이 아늑해집니다.

가판대, 음식 판매대, 천장 등 시장의 하드웨어뿐만 아닙니다.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에도 신경을 썼죠. 일주일 혹은 이주일 주기로 골동품 마켓, 바이닐 마켓 등을 열고, 크리스마스, 밸런타인데이 등에는 그에 어울리게 시장 컨셉을 기획합니다. 여기에다가 정기적으로 콘서트, 공연, 페스티벌, 전시 등을 개최해 시장을 방문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즐길 수 있게 만들었죠. 이렇게 콘텐츠를 입히니 시장의 활력이 더 강해집니다. 다양한 매장이 모여있어 시장 자체가 하나의 채널인데, 이 매장들의 조합이 달라지고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더해지니 채널 경쟁력이 높아지는 거죠. 시간을 점유할 수 있는 힘이 세집니다.

밸리모어 그룹의 노력 덕분에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은 생기를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퇴사준비생 이모씨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찜찜함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시장을 살릴 수 있다면 못 살릴 시장이 별로 없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든거죠. 그래서 더 조사를 해봅니다. 시장 자체를 리빌딩한 것 이상의 고민이 숨어 있을 거란 기대로요. 아니나 다를까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에는 다른 시장에서는 찾기 어려운 특별함이 있었습니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시장 내부에서 벗어나 시장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을 재생시키는 마스터 플랜에는 시장 리빌딩뿐만 아니라 업무 공간 조성이 담겨 있었습니다. 시장 바로 옆에 9~12층 규모의 4개 동으로 구성된 복합 업무 단지 '텐 비숍스 스퀘어(10 Bishops square)'가 들어선 거죠. 이 업무 단지 또한 노만 포스터가 설계했습니다. 그가 업무 시설을 디자인하면서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의 가판대까지 손을 봐준 셈이죠.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배후 인구가 들어서니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을 찾는 기본적인 수요가 생깁니다. 특히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이 있던 동네 자체가 쇠퇴하고 있던 거라면 새로운 상주 인구 확보가 더욱 중요합니다. 여기에다가 텐 비숍스 스퀘어와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 사이에 2개 층으로 이루어진 아케이드 형식의 쇼핑몰을 연결해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동선이 이어지게 공간을 구성했습니다. 이렇게 런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시장이 만들어지고,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이 생기를 되찾은 거죠.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이 다시 활력을 찾은 배경에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의 변신뿐만 아니라 오피스 워커라는 상주 인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장이 오프라인 매장의 집합으로서 채널 경쟁력을 갖는다 하더라도, 마음 먹고 가야하는 곳이라면 사람들의 발길을 이끌기가 쉽지 않죠. 반면에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배후 인구가 든든하게 있다면 상대적으로 사람들의 시간을 점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물론 방문하고 싶을 만큼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건 전제겠죠.

#2. 버려진 창고를 바꾸는 상상력 - 콜 드롭스 야드

일상 속에 침투하는 것이 시간을 점유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아닐까?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의 재생 사례에서 시간 점유율을 확보하는 힌트를 얻었습니다. 온라인 커머스, 미디어, 그리고 콘텐츠와 경쟁해야 하는 오프라인 비즈니스에게는 상주 인구라는 우군이 필요하다는걸요. 물론 오프라인 매장이 미디어화, 채널화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여행지가 되어야 하는 건 여전히 유효합니다. 여기에다가 상주 인구가 기본 수요를 받쳐준다면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보다 안정적으로 날개를 달 수 있다는 거죠. 그는 상주 인구의 중요성을 올드 스피탈필즈 마켓의 재생 사례만큼 인상적이었던 '콜 드롭스 야드(Coal Drops Yard)'에서도 느낍니다.

콜 드롭스 야드는 산업 혁명이 한창일 때 석탄 저장 창고로 쓰였으나 석탄 수요가 급감해 기능을 잃고 방치되었던 곳이었습니다. 1970~80년대에는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우범지대로 전략했죠. 이곳을 부동산 개발회사 '아전트(Argent)'가 주목 받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재생시켰습니다. 사실 런던은 도시 재생의 모범을 보여주는 곳이라 도시 재생을 왠만큼 잘해서는 명함을 내밀기 어렵습니다. 기능을 잃은 화력 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리모델링한 '테이트 모던 뮤지엄', 우범 지대를 스트리트 아트 등이 가득한 문화예술지구으로 탈바꿈시킨 '쇼디치' 지역 등 버려진 공간의 쓸모를 찾아 꾸준히 재생시켜 왔죠. 이중에서도 콜 드롭스 야드가 눈에 띄는 건 도시 재생의 또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콜 드롭스 야드에 가보면 카메라를 꺼내들게 됩니다. 건물의 모양이 독특하니까요. 콜 드롭스 야드는 겉모습을 그대로 두고 내부를 리모델링하는 보통의 방식과 달리, 석탄 창고로 쓰이던 건물 2개 동의 지붕을 이어붙여 상징적인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언뜻 보기엔 천사의 날개처럼 생겼으나, 공식 명칭은 '키스하는 지붕(Kissing roofs)'입니다. 이름을 듣고 보면 이어진 부분이 익살스러운 입술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름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건물 모양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요. 여기에 힙한 레스토랑, 바, 편집숍 등 60개 이상의 매장이 들어서 있습니다. 위트 있는 건물 디자인과 감도 높은 매장 구성으로 콜 드롭스 야드는 미디어와 채널로서 필요 조건을 갖춘 셈입니다. 하지만 콜 드롭스 야드의 재생을 이것만으로 설명하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콜 드롭스 야드의 보이지 않는 차별점은 키스하는 지붕 너머에 있습니다. 그 주변으로 비즈니스 타운을 조성한 거죠. 보통의 경우 도시 재생을 할 때 아티스트들을 불러들여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하는데, 콜 드롭스 야드는 구글, 페이스북 등 글로벌 IT 기업의 직원들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지역은 교통의 요지라 비즈니스에 유리한 조건을 갖췄습니다. 유럽 대륙으로 연결되는 '유로스타(Eurostar)'를 탈 수 있는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역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어, 미국 IT 기업들이 영어를 쓰는 런던에 거점을 두고 유럽 대륙에 비즈니스를 펼쳐갈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 때문이죠. 이런 지정학적 이점을 바탕으로 대규모의 오피스 워커가 상주 인구로 자리잡습니다.

콜 드롭스 야드 건물에서 조금만 걸어가다 보면 대학교도 보입니다. 근처의 화물 터미널 부지에 런던 예술 대학에 소속된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Central Saint Martins)' 캠퍼스가 있는 거죠. 터미널 부지의 건물 외관을 그대로 두어 학교처럼 보이지 않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예술 대학의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기존의 도시 재생처럼 아티스트들을 불러들인 건 유사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아티스트를 육성하는 학교를 끌어들였다는 점입니다. 덕분에 더 큰 규모의 상주 인구가 생깁니다. 여기에다가 그 뒤편에 시선을 사로잡는 육중한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은 보기와 다르게 주거 시설입니다. 콜 드롭스 야드와 함께 산업화를 상징했지만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은 3개의 가스 저장고를 리모델링해 공동 주택을 만든 거죠.

만약 콜 드롭스 야드를 재생시킬 때, 석탄 창고 2개 동에만 초점을 맞췄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영국의 대표적인 디자이너이자 이 시대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는 '토마스 헤더윅(Thomas Heatherwick)'이 디자인한 키스하는 지붕과 그곳에 입점한 감도 높은 매장으로도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발길을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화제몰이 시기가 지난 후에도 외부의 사람들이 꾸준히 방문하는 상업 시설이 될지는 모를 일입니다. 이 불확실성을 낮추는 요소가 오피스, 대학교, 주거 시설 등의 상주 인구입니다. 그들이 일상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공간으로 자리잡을 수 있으니까요.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해질녁의 콜 드롭스 야드를 바라 보면서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철도와 운하가 만나는 곳에서 석탄 창고와 관련 시설로 쓰이던 너른 부지에 오피스, 대학교, 주거 시설, 매장이 들어선 풍경을 어디선가 본 거 같아서죠. 가만히 생각해보니 형태는 다르지만, 본질은 유사한 곳을 도쿄에서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동산 개발회사 '모리 빌딩(Mori building)'이 롯폰기 지역을 재개발해 만든 '롯폰기 힐즈(Roppongi hills)'입니다.

#3. 쇠퇴한 동네를 살리는 철학 - 롯폰기 힐즈

콜 드롭스 야드와 롯폰기 힐즈는 서로 다릅니다. 콜 드롭스 야드는 버려진 공간의 대부분을 재생해서 만들었고, 롯폰기 힐즈는 롯폰기 지역을 재개발하면서 일대를 부수고 새롭게 지었죠. 또한 콜 드롭스 야드가 다양한 시설을 지역에 수평적으로 넓게 펼쳐냈다면, 롯폰기 힐즈는 몇 개의 고층 빌딩에다가 수직적으로 집적해 놓았습니다. 게다가 콜 드롭스 야드는 2018년에 새단장을 알린 반면, 롯폰기 힐즈는 그보다 15년 전인 2003년에 오픈했습니다. 둘이 이렇게 다른데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왜 기시감을 느꼈던 걸까요? 시간 점유율의 관점에서 보면 둘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롯폰기 힐즈의 개발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롯폰기 힐즈는 '수직도시론'이라는 철학적 배경을 가지고 개발한 곳입니다. 수직도시론은 단순히 도쿄의 땅값이 비싸니까 높이 짓자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산업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부동산 개발 방향성입니다. 공업 사회에서는 일터와 주거가 분리되어 있었고, 그랬기에 근로시간이 끝나면 일을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일과 생활이 분리되어 있었던 거죠. 그러나 지식산업 사회에서는 공장의 기계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의 머리와 감성을 가지고 가치를 창출하는 만큼 일하는 시간은 물론이고 여가 시간도 중요해집니다. 이 시간에 휴식을 취하기도 하지만, 영감의 원천을 채울 수도 있기 때문이죠.

수직도시론은 일터, 주거지, 문화 시설, 휴식 공간의 경계를 없애서 지식산업 사회에 적합한 환경으로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수직도시를 건설해 출퇴근 시간의 낭비를 줄이고 여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어딘가를 찾아가는 시간을 아껴, 절약한 시간만큼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거죠. 또한 다양한 시설을 수평으로 펼치지 않고 수직으로 쌓아 올리면 필요한 땅의 면적을 줄일 수 있는데, 그렇게 확보한 땅을 공원 등으로 만들어 도심 속에서도 자연을 누리고 휴식을 즐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롯폰기 힐즈에는 지식 노동자들이 시간을 생산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돕자는 철학이 밑바탕에 깔려있습니다.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롯폰기 힐즈의 개발 철학이 허울뿐인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로벌 기업들의 오피스, 레지던스, 인기 있는 브랜드 매장이야 다른 복합 시설과 큰 차이가 없어 보였죠. 하지만 현대 미술을 전시하는 '모리 미술관', 직장인들의 자기계발 공간인 '아카데미 힐즈'를 방문했을 때는 진정성이 느껴졌습니다. 모리 미술관과 아카데미 힐즈는 각각 롯폰기 힐즈에 있는 모리빌딩의 53층, 49층에 위치해 있는데, 전망 좋은 최상층부를 수익성 높은 레스토랑이나 바가 아니라 문화를 위한 공간으로 배치할 만큼 지식산업 사회의 오피스 워커가 시간을 의미있게 쓸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주 인구가 한 곳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구역을 구성하는 것. 퇴사준비생 이모씨가 콜 드롭스 야드에서 기시감을 느낀 이유입니다. 그렇다고 콜 드롭스 야드를 재생시키면서 '수평도시론'과 같은 키워드를 내세우며 거창한 철학적 배경을 밝힌 건 아닙니다. 하지만 단순히 상업 시설을 재생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일대에 오피스, 학교, 주거 시설 등을 포진시켰다는 점에서 모리 빌딩이 재개발한 롯폰기 힐즈와의 공통 분모를 찾을 수 있죠. 이처럼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활성화되기 위해선 외부에서 사람들이 올 수 있도록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안정적 수요를 창출하는 상주 인구의 시간을 점유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고려해야할 요소입니다.


'여행지가 되거나 생활권이 되거나, 혹은 둘 다이거나'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오프라인 비즈니스가 채널화를 바탕으로 시간 점유율을 높이는 방법을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로 봤습니다. 여행지가 되어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싶게끔 하거나, 아니면 생활 권역에 있어 일상의 시간 속에 침투하는 거죠. 둘 다 해당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고요. 어중간한 곳에 위치한다면 어지간한 매력이 있지 않는 이상, 살아남기가 점점 힘들어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물론 3화에서 설명했듯 스마트폰으로 인해 오프라인 비즈니스에서 입지의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큰 틀에서 여행지나 생활 권역에 매장이 위치할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갈 만한 강력한 이유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하죠.

퇴사준비생 이모씨는 런던, 도쿄 등을 다녀왔던 기억이 문득 그리워졌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해외 여행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더 그랬죠. 한편으로는 멀리 해외로 떠날 수 없다면 국내에서 이런 경험을 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죠. 런던, 도쿄 등의 사례를 되짚어 보면서, 글로벌 추세가 이러하다면 우리나라에도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설계하면서 오프라인 비즈니스의 미래를 만들어 가려는 시도가 있을 거란 기대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찾아보기로 합니다.

국내에도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설계하려는 시도가 있을까?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참고문헌

리테일 4.0 (필립 코틀러 · 주셉페 스틸리아노 지음, 더퀘스트)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 (유현준 지음, 을유문화사)

런던에서 만난 도시의 미래 (김정후 지음, 21세기북스)

생각이 기다리는 여행 (이동진 지음, 트래블코드)

퇴사준비생의 도쿄 (이동진 외 지음, 더퀘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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