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book / 졸업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졸업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1화 : 졸업만 하면 뭐든 되겠지

*링커가 읽어주는 1화 오디오로 만나보세요.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난 항상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고 대답했었다. 그냥 손을 이용해 만들기를 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래서 대학 전공으로 기계공학을 선택했다. 기계공학을 배우면 뭐든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학부 수업은 직접 만들기 보다 공학계산기를 두들기며 끊임없이 계산만 하는 수업이 주류를 이뤘다.

‘언제쯤 무엇인가를 직접 만들 수 있을까’, ‘만들기를 할 수 있는 걸까’를 고민하던 그때, 우연히 들었던 산업디자인 교양과목은 나의 갈증을 해소해줄 단비 같았다. 나도 숫자가 아니라 커다란 *아이소핑크를 손으로 직접 깎고 사포질 하며 물리적인‘무엇’을 만들고 싶었다. 다음해 고민없이 복수전공으로 산업디자인을 신청했다. 용감하게.

*아이소핑크: 단열제로도 사용하시만 스티로폼처럼 구조나 형상을 만들 때 사용하는 재료중 하나.

하지만, 치열한 입시 미술을 거쳐 들어온 학생들에 비해 나의 스케치 능력은 엉성한 유치원 어린이 같았다. 디자인은 가시적인 형상이 전부가 아니기에 크게 개의치 않으려고 몇 번을 다짐했지만 교수님이 과제로 제출한 내 스케치를 들며 “누가 깍두기를 그려서 냈냐”고 말할 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스케치는 따라 갈 수 없었지만, 곧잘, 아니 제법 잘하는 것도 있었다. 컴퓨터로 그리는 3D모델링은 적성에 맞았다. 마침 기계공학에서도 3D모델링을 배웠고 산업디자인에서도 3D모델링을 배운 덕에, 프로그램이 달라도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를 표현해 과제로 제출하기에는 충분했다.

대학만 나오면 해결될 줄 알았던 모든 것

연구실 책상에 앉아 머리를 뜯고있는 나의 뒷모습. 내가보는 세상은 앞에 놓인 네모난 모니터가 전부였다.

나만은 아닐 거다. 일단,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을 하면 저절로 어른이 되고 직업도 갖게 될 줄 알았던 막연한 믿음 말이다. 많은 대학생이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좌절의 시간을 걷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서지 않았다. 학부 공부는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 깨닫게 해줬을 뿐이었다.

어릴 적 꿈이었던 선생님이 떠올랐다. 발명이나 과학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대학교 때 잘 나온 성적 탓에 가족과 주변 지인들은 대학원 가서 박사 학위를 받고 교수하면 어떻겠냐는 조언을 했다. 나 역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교수라는 직업이 좋아 보였다. 그렇게 석박 통합과정으로 대학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때도 나는 어리석었다. 대학 때와 똑같이 대학원을 졸업하면 무엇인가 알아서 되어있을 줄 알았다.

선생님이 되고 싶은 이유는 부모님이 내가 중학생이 될 때까지 집에서 놀이방을 운영한 영향이 있었던 같았다. 집에는 늘 아이들이 북적거렸고, 천성적으로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는 아이들과 놀며, 아이들 눈높이에 맞게 설명하고 가르쳐주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했을 때, 뿌듯함을 느꼈다.

내가 생각한 교수라는 직업은 관심있는 주제를 연구하며 학생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가르쳐주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학원을 다니며, 지켜본 ‘교수’라는 직업은 나의 생각과 달랐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가르치는 내용과 방법을 고민하기 보다는 기계적으로 쓰는 논문과 연구비, 사업비 등 실적에 집중하는 사람이었지 고등 교육 기관으로‘교육’의 면모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몇 년째 돌고 있는 족보와 5년 전에 만들어 5년 전에 수정한 수업 파일 등, 교육에 무책임한 교수의 행동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참고로 내가 다녔던 대학원이 당시 5년 전에 개교한 학교였는데, 개교하고 단 한 번도 수업 파일을 안 바꿨다는 이야기다.)

연구는 내가 하고 싶은 주제가 아니라 연구비가 들어온 항목 또는 교수님이 선택한 주제여야 했고, 사실 연구라고 썼지만 사무적인 업무가 더 많았다. 사업계획서와 보고서는 물론 매일 쌓여가는 영수증을 이면지 뒷면에 하나하나 붙이고 쓴 항목을 정리하는 것은 내가 대학원생인지 학교 행정 직원인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학비를 해결하기 위한 장학금을 받으려면 연구 과제는 물론이고 수업을 보조하는 조교일도 병행해야 했다. 학교 부서를 돌아다니며 각종 서류를 처리하고, 교수님과 미팅하고 내가 듣는 수업과 조교를 맡은 수업을 들어가면 하루가 금방 지나갔고, 온전히 내가 연구할 시간은 늦은 밤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처음에는 원래 그런 건가 하며 지내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회의감이 들었다. 사실 이 고민은 나만의 것은 아니었다. 2014년 말 읽은 <나는 지방대 시간 강사다>라는 책에는 분노,슬픔,고통,안타까움,좌절 현존하는 시스템에 안일하게 굳어버린 회색빛의 대학 사회를 보여주고 있었다. 시간도 없는데 어떻게 내 연구를 할 수 있는지, 이렇게 대학원을 졸업하면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만 늘어났다.

가만히 있으라

대학원 생활이 3년차가 된 2014년, 그날도 다름없이 아침 일찍 기숙사에서 일어나 준비를 하고 걸어서 15분 거리의 연구실로 향했다. 빈속을 달래는 인스턴트 커피 한잔을 타고 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딱히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 중의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때,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뉴스를 들려왔다. 큰일 아니길 바라며 빨리 구조가 되길 바라며 내가 조교로 들어가는 오전 수업에 들어갔다. 1교시 수업을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오니 같은 연구실 친구가 전원 구조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한,두시간 후 오보로 판명 났다.

그렇게 세월호는 점점 더 깊고 차가운 물속으로 사라졌고 구조는 더디었다. 뉴스를 볼 때마다 암울한 시간은 계속 되었고 우리 모두는 아팠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너무 아프다. 연구실 책상에 앞에 앉아 모니터를 키면 들려오는 안타까운 소식들에 마음이 먹먹해지기만 했다. 그때 들은 뉴스에서 안내방송으로 나온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은 꼭 나한테 하는 말 같았다.

그리고 계속 같은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으라 … 책상 앞에 가만히 있으라 …

석,박 과정을 졸업하기위해 나는 몇 년을 더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할지 까마득했다. 박사 학위가 하나 더 늘더라도 그 다음을 알 수 없었다. 답답했다. 가까이에서 본 ‘교수’라는 직업의 사람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인지에 대한 고민도 들었다. 2014년 유독 지독했던 각종 사고들을 보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책상 앞에서 나의 모든 20대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해 석박 과정을 포기했다.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2년이 훌쩍 넘은 시간이 걸렸지만, 더이상 책상 앞에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 모니터 말고 세상을 보고 싶었다.

2014년 행운이라면, 메이커 페어를 만났다는 것

대형 물음표 상자, 공중에 매달린 작품 덕에 항상 손으로 잡고 서있었다.

대학원 생활이 모두 암울했던 건 아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찾은 것도 어쩌면 그 시절이다. 대학원 생활을 하면서 이론적인 머리 공부보다 근질근질한 손의 활동을 찾아다녔고 결국 학부생들이 하는 프로토타이핑 동아리 ‘디노’에 대학원생으로는 처음으로 들어갔다. 나를 필두로, 지금의 디노는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

2014년 여름, 디노의 동아리부원으로 활동하던 후배가 메이커페어 서울에 참가하자고 제안했다. 나의 대답은 간단했다.

“메이커? 메이커페어? 그게 뭐야?”

그날 밤, 인터넷을 뒤져 메이커, 메이커페어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들은 멋있을 뿐만 아니라 이상한 작품들도 넘쳐났고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는 것에 매우 놀랐다. 나 같은 사람을 메이커라고 부른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메이커라는 단어가 꾀 마음에 들었고 나도 괜찮은 메이커가 되고 싶었다. 그렇게 첫 메이커페어 서울을 망설임 없이 참가하게 되었다.

서울 메이커페어를 참가하기위해 ‘디노’ 친구들과 함께 작품을 만들었다.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경험을 주자’를 주제로 아이디어를 내어 슈퍼마리오 게임에서 나오는 물음표상자를 실제 사람들이 놀 수 있는 커다란 물음표 상자를 만들기로 했다. 물음표 상자 위에 디스플레이를 달아 게임처럼 벽돌을 치면 동전, 꽃, 버섯 등의 아이템이 소리와 함께 랜덤으로 나오게 구상했다.

메이커페어 서울 행사 첫날, 물음표 상자를 관람객들이 직접 쳐볼 수 있도록 공중에 매달아 설치하였다. 작품은 만드는데 집중하느라 전시 형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커다란 물음표 상자가 공중에 매달려 있다 보니 사람들이 칠때마다 심하게 흔들렸고 결국 친구들과 교대로 1시간씩 손으로 직접 잡고 서있었다. 행사 내내 팔이 너무 아팠지만 물음표 상자를 치고 싶다며 어린 친구들이 줄을 설 때면 미소가 나오며 저절로 팔이 올라갔다.

중간중간 다른 사람의 작품을 구경하러 돌아다니고 구경 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설명해주고 나니 메이커페어가 끝났다. 행사 이틀 내내 들고있던 팔때문에 어깨가 아팠지만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왜 이걸 이제 알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2014년 첫 메이커 페어를 시작으로 매년 꾸준히 메이커페어 서울을 참여하고 있다. 행사 기간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고 끊임없이 설명해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은 힘들지만 메이커페어가 끝날 때면 힘드니까 내년에 오지 말아야지가 아니라 내년에는 뭘 만들어서 나오지? 내년에는 또 어떤 사람들이 올까? 하는 설레임이 시작되었다.

매년 참가중인 메이커페어 서울의 나의 이름표
메이커, 메이커페어 (maker, makerfair)

메이커는 무엇인가 스스로 만드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여기서의 ‘무엇’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리적인 옷, 장난감, 의자부터 영상과 음악,글 등 창작의 경계를 두지 않는다. 과거에도 무엇인가 만드는 행위는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해 왔다. 2000년대 중반부터 미국에서 시작되고 확산되고 있는 메이커, 메이커문화는 인터넷을 통한 공유 문화와 함께 성장 중이다. 메이커들은 공개된 정보를 이용하여 만들기도 하고 또는 자신이 만든 성공, 실패 사례들을 다시 공유하기도 한다.

메이커페어는 무엇인가를 만든 메이커들이 1년에 한번 모이는 대표적인 축제이다. 미국의 메이크 잡지와 메이크 관련 책을 출판하고 있는 Make:가 2006년 샌프란시스코 밑에 San Mateo 에서 시작한 행사이다. 메이커페어는 참여를 원하는 메이커들의 작품 전시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행사이다.

나이 성별 제한 없이 개인 메이커들은 참가비 없이 자신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출품하여 전시할 수 있다. 아두이노, 3D 프린팅 부터 뜨개질, 목공, 요리는 물론이고 음악과 퍼포먼스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일 수 있다. 메이커페어는 보통 3개월 전, 빠르면 5개월 전에 메이커페어에 참가하고 싶은 메이커와 프로젝트를 모집한다.

단, 조건이 있다면 메이커페어에 방문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프로젝트에 대하여 질문한다면 친절하게 설명해 줘야한다. 메이커페어는 단순히 작품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만들었는지 관련 정보와 지식이 공유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메이커페어는 행사의 규모에 따라서 4가지로 구분 되는데 Flagship, Featured, Mini, School 있다. Flagship Faire는 Make:에서 직접 주관하는 행사로 규모가 가장 큰 메이커페어이다. Flagship 메이커페어에는 5월에 열리는 Maker Faire Bay Area와 9월에 열리는 World Maker Faire New York이 있다.

Featured Faire는 각 나라의 도시 이름을 걸고 열리는 메이커페어로 미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의 큰 도시들이 메이커페어 행사가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도 2012년 부터 메이커페어 서울이 매년 개최되고 있다. Mini Faire는 도시보다 작은 규모의 메이커페어 이고 School Faire는 초중고 학교에서 열리는 메이커페어를 말한다. 이렇게 크고 작은 메이커페어 221개가 2017년 45개국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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